[사유의 순간] 애쓰지 마라 어차피 안 된다

애쓰지 마라

 

어차피 안 된다


글.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김태균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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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 31일 밤이 되면,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적이고 고결한 ‘나름 지식인’의 표정을 지은 채 다이어리를 펼친다. 만년필촉에 힘을 주어 아주 멋지게 새해 다짐을, 그것도 영어로 적어 내려간다. “Eat less. Speak less. Think less.” 덜 먹고, 덜 말하고, 덜 생각하자. 이른바 내 인생의 ‘삼소(三少) 프로젝트’다. 

인간의 불행은 대개 이 세 가지를 과하게 해서 생긴다. 과식은 만병의 근원이고, 과언(寡言)하지 못함은 결국 말실수로 이어지고, 과도한 생각은 인간을 불안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삶의 철학인가!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간결한 문장으로(그것도 영어로) 표현했다. 이런 다짐을 했다는 것만으로 내 자의식은 이미 플라톤이나 칸트 수준으로 격상되었다는 황홀함에 빠진다.

그러나 신은 공평하다. 내게 지적인 허세는 듬뿍 주었지만, 그걸 지킬 수 있는 갸륵한 성정은 깜빡하고 빠뜨린 게 틀림없다. 올해로 딱 20년째, 나는 이 다짐을 단 하루도 지킨 적이 없다. 20년이다, 20년! 이쯤 되면 실패가 아니라 내 삶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Eat less.”의 역사에는 치욕스럽고 값비싼 유물이 하나 있다.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할 즈음, 나는 백화점의 어느 명품관에서 눈이 뒤집혀 007의 제임스 본드나 어울릴 법한 슬림 핏 셔츠를 하나 샀다. “손님, 이건 몸을 좀 만드셔야 맞겠는데요.”라는 점원의 무시(혹은 치밀하게 계산된 상술)에 오기가 발동해 덜컥 카드를 긁어버렸다. 지난날 날렵했던 실루엣을 추억하며, 딱 5kg만 빼면 입을 수 있다고 소비를 정당화했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셔츠는 옷장에 부적처럼 걸려, 매년 1월 1일마다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살은 언제 뺄 것이냐?”라고 채권 추심하듯 나를 채근했다. 회식의 즐거움과 야식의 마력 앞에서 내 이성은 빛의 속도로 증발했다. ‘음식은 칼로리가 아니라 행복의 총량이다’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매일 밤 야식 파티는 메뉴를 바꿔가며 계속됐다. 매년 봄이 오면 아내는 옷장을 열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한마디 툭 던진다. “저 셔츠는 언제 입을 거야? 몸에 들어는 가?” 아내의 팩트 폭행은 언제나 예리해서 뼈가 시리다. 결국 그 셔츠는 10년 넘게 소매 한 번 꿰어보지 못한 채, 세월의 무게만큼 누리끼리해진 채 의류 수거함으로 들어갔다.

“Speak less.”는 또 어떤가. ‘나름 지식인’인 나는 작은 질문에도 장편 소설처럼 말한다. 며칠 전 저녁 식탁에서도 사춘기를 아주 ‘씨게’ 보내고 있는 아들의 “학교는 왜 다니느냐, 학교는 언제 생긴 거냐.”라는 푸념 섞인 물음에, 무상교육을 주장한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콩도르세부터 시작한 답변은 독일과 프랑스의 교육 이념 차이와 일본을 통한 서양 교육 개념을 도입한 개화기까지 이어졌다. 아들의 한숨과 장미칼 같은 아내의 눈초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기 망정이지, 현대 교육철학의 경향까지 이어졌다면 나는 밥도 다 못 먹고 식탁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가장 최악은 “Think less.”다. 생각을 줄이기는커녕 침대에 누우면 온갖 망상과 공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비트코인이 10만 원일 때 샀더라면 지금쯤 호텔에서 살고 있을 텐데….’, ‘늙으면 누가 나랑 놀아주나’부터 시작해서 ‘태양이 수명을 다해서 팽창하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까지 온 우주적 오지랖이 발동한다. 뇌세포가 밤새 축제를 벌이니 아침마다 머리가 깨질 듯 무겁다. 


그렇게 20년 동안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해대고 나니 마침내 아주 중요한 실존적 깨달음이 왔다. 

“노력하지 마라. 지금까지 안 됐으면 그건 안 되는 거다!”

원래 인생이란 건 가만히 놔둬도 무지막지하게 복잡하게 꼬이기 마련이다. 온갖 사회적 이목, 체면, 도덕적 의무, 타인의 시선과 같은 것들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얽혀 있으니 복잡할 수밖에 없다. 까딱하다가는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한 진짜 핵심은 이 꼬여버린 인생을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나는 ‘이 다짐은 꼭 지켜야 한다. 이것만이 올바른 길이다’라는 가짜 확신에 속아 스스로를 괴롭혀 온 것이다. 내가 만든 새해 다짐이 나를 꽁꽁 묶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확신을 갖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완벽하게 다이어트나 묵언수행을 해 낼 것이라고 무슨 수로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책 속에 파묻혀 사념과 번뇌로 가득 찬 두목을 향해 말한다. “당신은 한 가지만 빼고 다 가졌소. 그건 바로 광기요. 사람이 광기가 없으면 감히 자신을 묶은 로프를 잘라내어 자유로워질 엄두를 내지 못하거든요.”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 조르바의 광기였다. 20년 동안 나를 꽁꽁 묶고 있던 새해 다짐이라는 구차한 로프를 잘라버릴 단 한 번의 무모함 말이다. 

언젠가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보다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무겁고 지독한 탐미주의 영화를 만드는 거장의 좌우명이 고작 ‘아님 말고’라는 것이다. 밤새 지독하게 고민하며 콘티를 짜다가도, 현장에서 막상 찍어보고 이상하면 미련 없이 털어버린다. ‘아님 말고’. 아, 이 얼마나 조르바다운 위대하고 단순한 삶의 경지인가!

내가 지난 20년간 불행했던 이유는 ‘아님 말고’의 광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슬림 셔츠가 안 맞으면 ‘아님 말고’하고 바로 남에게 줘버려야 했다. 적게 먹고, 적게 말하고, 적게 생각하겠다는 그 알량한 결심을 지키지 못했을 때도,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아님 말고’하며 털어버렸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니, 노력해야 한다느니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은 내 생긴 꼬라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약간의 대범함과 작은 용기였다. 무상교육의 폐해다. 돈을 안 냈으니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이제 나는 20년 묵은 다이어리의 그 잘난 영어 문장들을 매직으로 박박 지워버리려고 한다. 대신 복잡한 세상에 맞서는 가장 단순한 무기를 새로 쓸 것이다. “지금 먹어라. 죽으면 못 먹는다.” “떠들 수 있을 때 떠들어라. 남 욕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하는 것은 돈 들지 않는다.”

인생 별거 없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 앞에서 열어달라고 애걸복걸 말자. 절대 안 열어준다. 나만 비참해진다. 그냥 생긴 꼬라지대로 먹고 싶은 거 먹고, 친구들 만나 침 튀기며 수다 떨고, 밤에는 대충 넷플릭스나 켜 놓고 온갖 헛된 생각을 하며 잠들면 그만이다. 잘나고 거창한 무엇을 이루는 삶, 그런 건 다음 생에 해도 된다. 내 인생을 아주 단순하게 만드는 것, 그건 무책임한 도망이 아니라 내 소중한 오늘을 구원해 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름 지식인’을 지향하는 만큼 내게도 문체는 있습니다. 이 글은 내 문체가 아닙니다. 작정하고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스타일을 흉내 냈습니다. 일종의 오마주라고나 할까요. 

제법 잘 따라했다고 만족합니다. 아니라고요? 아님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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