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푸른 밤,
바다 위에서 만난 가장 찬란한 시간
글. 서울행정법원 김보미 주무관
서부 지중해 크루즈를 1인 86만 원에 떠날 수 있다고?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된 건 우연히 발견한 가격 때문이었다.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해결하고, 해외 크루즈 예약 사이트(cruisedirect.com)에서 MSC 월드 유로파 서부 지중해 7박 8일 일정을 2인 기준 172만 원에 예약했다. 1인당 86만 원. 예약이 잘 된 건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그 금액 안에는 이동, 숙박, 하루 종일 무제한으로 이용 가능한 뷔페와 코스 레스토랑, 수영장과 각종 시설, 그리고 매일 밤 달라지는 공연까지 포함돼 있었다. 기본 객실인 인사이드 캐빈으로 예약한 뒤, 크루즈 비딩에 참여했다.
비딩이란 더 높은 등급의 객실로 업그레이드 되길 원하는 승객이 추가 금액을 제안하는 일종의 경매 방식인데 최소 금액인 250달러, 약 35만 원을 제시했더니 야외 테라스가 딸린 발코니 룸으로 업그레이드되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덕분에 우리의 첫 크루즈는 매일 아침 발코니에서 지중해를 마주하는 여행이 되었다.
내 생의 첫 크루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처음 월드 유로파를 마주한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로마 치비타베키아 항구에서 처음 마주한 MSC 월드 유로파는 상상했던 배의 크기를 완전히 넘어선, 바다 위에 떠 있는 눈부신 미래 도시 같았다. 길이 333m, 높이 77m, 20층 규모에 무게만 21만 톤.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약 9,000명이 함께 탑승하는 이 거대한 크루즈는 하나의 리조트가 그대로 바다 위에 옮겨져 있는 듯했다. 15개의 레스토랑과 20개가 넘는 바와 라운지, 공연장, 실내외 수영장과 월풀, 자쿠지까지 합치면 20개가 넘는 시설에 카페, 맥주 양조장, 카지노와 바버샵까지 있으니 말이다.
설렘과 기대,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7박 8일 지중해 바다 위에서 보낸 시간
로마를 출발한 MSC 월드 유로파는 천천히 지중해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도시의 불빛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고 배 위에서 바라본 첫 노을은 여행의 시작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갑판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는 설렘 때문인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기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순간이 다른 여행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창밖으로 끝없는 바다가 펼쳐졌다. 어떤 날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고, 어떤 날은 짙푸른 물결이 조용히 일렁였다. 우리는 매일 아침 발코니에 나란히 서서 일출을 바라보았다. 굳이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지중해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나라와 도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칠리아에서는 따뜻한 햇살과 여유로운 골목 풍경 속에서 남부 이탈리아의 매력을 만끽했다.
몰타에서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아름다운 석조 건물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졌다.
바르셀로나는 살아 있는 예술 그 자체였다. 가우디의 건축물이 도시 곳곳에 숨어 있었고, 거리마다 음악과 색채가 넘쳤다. 해 질 무렵 붉게 물든 바르셀로나의 하늘은, 아마 이번 여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눈에 새겨진 장면이었다.
마르세유에서는 항구를 따라 걸으며 프랑스 남부 특유의 낭만을 느꼈다.
제노아에서는 오랜 역사가 담긴 골목과 건축물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배로 돌아오면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양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고, 공연장에서 화려한 쇼를 관람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매일 다른 나라, 다른 도시를 만났지만, 여행의 중심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낮에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저녁에는 노을로 물들고, 밤에는 별빛을 품은 지중해의 풍경이 매일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 밤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은 크루즈 여행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어느 날 밤, 갑판 위 의자에 나란히 앉아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평선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파도 소리만이 조용히 귓가를 스쳤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지금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거창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지금까지 27개국을 여행하며 수많은 풍경을 만났지만 그날 밤 지중해 위에서 느꼈던 고요한 행복은 다른 어떤 풍경보다 깊게 마음속에 남아있다.
크루즈 여행은 다리 떨릴 때 말고 가슴이 설렐 때
7박 8일 동안 우리는 4개국 6개 도시를 만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에 남는 것은 도시의 이름보다 바닷바람의 온도였고, 관광지보다 함께 바라보던 노을의 색이었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지중해가 떠오른다. 끝없이 이어지던 푸른 수평선, 따뜻하게 스쳐 가던 바닷바람,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람과 함께했던 반짝이는 시간들. 그 푸르던 바다와 찬란했던 순간들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다음 항해를 꿈꾸고 있다. 더 큰 자연을 만나기 위해, 더 넓은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언젠가 알래스카의 빙하가 펼쳐진 바다 위에서도 사랑하는 남편과 이 설렘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